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은 ‘악화(bad money)가 양화(good money)를 구축(drive out)한다’는 법칙이다.
16세기 영국의 금융가였던 그레샴이 당시 여왕 엘리자베스에게 당시 영국 은화(shilling)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쓴 말인데, 그레샴의 법칙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19세기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맥클로우드(Henry Dunning Macleod)라고 한다.
간혹은 (뭐가 뭍거나 구겨지거나 해서) 더러워진 돈과 빳빳한 새 돈이 있을 때 더러워진 돈을 먼저 쓰는 경향을 그레샴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그레샴의 법칙이라는 경제 법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심리적인 현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레샴의 법칙은 은화 또는 금화를 쓰는 시스템에서만 일어나기 때문.
16세기 영국은 은으로 만든 동전(실링=은화)을 화폐로 이용하고 있었다. 은화는 사람 손을 거치다보면 자연적으로 마모되기 때문에 처음보다 은 함유량이 줄어든다.
게다가 영국 왕실은 의도적으로 은화 가장자리를 돌려깎기 하여 은 함유량이 원래보다 적은 은화를 더 많이 만들어서 유퉁시켰다. (더이상 돌려깎기를 할 수 없도록 은화 가장자리에 톱니를 냈다는 설도 있다.)
은화 공급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시장에는 은 함유량이 적은 은화와 은 함유량이 많은 은화가 동시에 유통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은 함유량이 적은 통화는 악화이고 은 함유량이 많은 통화는 양화다.
양화가 된 은화는 돈이기도 하지만 유형의 자산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양화를 녹이면 은이라는 실물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실물 자산이 된 은은 더 많은 은화로 교환될 것이다.
그레샴의 법칙을 조금 어렵게 표현하면 ‘양화인 은화’의 소재가치(은으로서의 가치)가 ‘악화인 은화’의 명목가치보다 크기 때문에 ‘양화인 은화’가 돈으로써 유통되지 않고 ‘은’이라는 자산으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하여 시장에서 구축(drive out) 현상이다.
그레샴의 법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 이라는 상황과 녹이면 은이나 금이 되는 은화 또는 금화가 화폐 기능을 하고 있어야 한다.
현대 경제 시스템에도 거의 항상적인 인플레이션은 존재하지만, 은화나 금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1971년 미국의 금 태환 정지 선언 이후 불태환 지폐 시스템을 쓰고 있는 현대 경제 시스템에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될 여지는 거의 없다.
그레샴의 법칙과 5만원, 비트코인?
보통은 발행된 화폐의 80% 정도가 시중에서 유통되는데, 2009년 6월에 발행된 5만원 권은 44%만 유통된다고 한다. (김민구, 『경제상식사전』, P.26)
5만원 권을 보관하는 사람이 많으니 5만원 권을 양화에 비견하고 다른 지폐를 악화로 비견하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비유적으로야 쓸 수 있겠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5만원 권이 실물자산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경제 법칙으로서의 그레샴의 법칙 예라고 할 수는 없다.
정부 인증 화폐와 암호화폐와의 관계에서 정부 인증 화폐가 암호화폐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암호화폐가 주류 화폐를 구축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그레샴의 법칙을 들이미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기술 발전에 따라 화폐 시스템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의 문제이지, 주류 화폐가 악화고 암호화폐가 양화 또는 그 반대로 비유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레샴의 법칙은 은 함유량이 높은 은화와 은 함유량이 낮은 함유량이 같은 명목 가치로 이용되던 시기에 인플레이션을 만나 은 함유량이 높은 은화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 경제 법칙이지만, 오늘날에도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떤 한 대상이 다른 대상을 몰아내는 현상에 그레샴의 법칙을 비유적으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현대 경제에서 진정한 의미의 그레샴의 법칙은 적용될 여지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