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정치의 영역은 다릅니다만, 경제가 정치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정치가 경제를 이용하는 듯한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래퍼 곡선과 관련된 주장이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래퍼 곡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래퍼 곡선을 믿는 자들이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래퍼 곡선은 최소한 정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래퍼 곡선이란?
래퍼 곡선(Laffer Curve)은 아서 래퍼(Arthur Laffer) 교수가 주장한 세율과 조세 수입의 관계를 나타내는 곡선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율이 증가하면 조세 수입이 증가하지만, 임계 세율을 초과할 경우 오히려 조세 수입이 감소한다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래퍼곡선을 제시했습니다.
세로(Y)축은 세율이고 가로(X) 축은 조세 수입입니다. 세율과 조세 수입은 정비례 관계 즉, 세율이 오를 수록 조세 수입이 증가하는 관계가 아님은 관념상으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세율이 지나치게 높으면 일할 동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 봐야 세금으로 빠져 나갈 것이까요. 사람은 동기부여가 안 되면 일을 열심히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조세 수입은 오히려 감소할 것입니다.
경제가 이런 상황이라면 세율을 낮추는 것이 오히려 조세 수입을 늘릴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세율을 인하 해야 한다고 래퍼 곡선을 믿는 사람들이 주장합니다.
관념상으로는 공감할 수 있지만, 문제는 현재 세율이 지나치게 높다고 할 수 있는가 입니다.
래퍼 곡선의 의미와 비판
현재 세율이 임계점을 넘었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래퍼 효과가 나타나는 세율이 얼마인지에 대해 실증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The Laffer Curve라는 영문 글에서 소개한 참고자료1에서는 한계세율이 70% 정도 일 때 임계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 2020년 현재 가장 높은 소득세 한계세율은 42%이므로 제시된 임계 세율과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폴 크루그만은 그의 책 경제학의 향연 3장 공급 중시론자들 파트에서 다음과 같이 현재의 소득세율이 임계 세율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래퍼 곡선 같은 것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급 중시론자들조차 미국 경제가 실제로 ‘퇴보 국면(backward sloping)’ 선상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공급 중시 경제학
공급 중시 경제학은 학자 보다는 언론인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급 중시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은 공급 경제학이라고 불리고 영어 명칭을 그대로 번역하여 공급 측면 경제학이라고도 합니다. 대개 수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고 공급을 중시하기 때문에 공급 중시 경제학이라는 말이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어울립니다.
공급 중시 경제학의 연원은 아마도 고전학파에 속하는 세이의 법칙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이의 법칙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법칙인데요, 이 법칙에 따르면 불황이나 공황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생산하기만 하면 수요는 알아서 충족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다르죠. 대공황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때때로 불황기를 거치는 것이 자본주의이니까요. 호황기에는 공급이 알아서 수요를 창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불황기에는 그 원인이 과잉 공급에 있든 과소 수요에 있든 수요가 부족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공급 중시 경제학이 세이의 법칙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불황의 원인은 수요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연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요 자체는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 공급 중시 경제학입니다.
수요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공급을 조절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세율 인하가 중요하다고 중요합니다. 세율 인하를 통해 노동 의욕과 투자 유인이 증가하여 생산이 증대하며 이에 따라 고용이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소득도 증가할 것이라고 봅니다.
세율 인하로 인해 조세 수입이 감소하고 적자가 누적될 경우 경제는 불황에 빠질 수도 있게 되는데, 공급 중시 경제학은 래퍼 곡선을 통해 조세 수입이 오히려 중가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설사 조세 수입이 감소하는 경우에도 세율 인하로 인해 민간 저축이 증가할 것이고 이는 투자 증가로 연결 될 것이기 때문에 조세 수입 감소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공급 중시 경제학의 입장은 다소 당황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수요가 경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은 과하고, 세율 인하가 조세 수입 증가로 연결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합니다.
보수주의자인 조지 부시도 공급 중시 경제학에 대해 부두(Voodoo) 경제학이라고 비아냥 거릴 정도로 주류 경제학과 보수주의자 양편 모두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1 Fullerton, Don (2008). “Laffer curve”. In Durlauf, Steven N.; Blume, Lawrence E. The New Palgrave Dictionary of Economics (2nd ed.). p. 839.